“ 정격 연주, 원전 연주, 역사주의 연주, 시대 연주 ”


오늘날 옛 음악을 연주하는 여러 방법 중에서, 작곡가가 곡을 쓸 때 마음 속에 염두에 두고 있었거나, 적어도 친숙하게 알고 있었거나, 또는 동시대 음악가들이 잘 알고 있었던 옛 악기나 그것을 복제한 악기를 그 당시의 방식으로 조율하여 그 당시의 일반적인 연주 관습에 따라 연주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여럿 있다. 오래 전에는 사람들이 이런 연주를 가리켜 '정격 연주(authentic performance)'라 했다. 이때 '정격성(authenticity)'이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올바르고(right) 진실성이 있으며(true) 본래의 것 ― 즉, '오리지널(orgianal)' 임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랜 시간 동안에 아주 굳건한 전통으로 자리 잡은 일반적인 연주 방식은 19세기를 거치면서 작곡가의 의도와는 달리 왜곡된 결과이고, 따라서 정당하지 못 한 '거짓된 것'이라는 점을 은연 중에 말하고 있는 용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전통적인 연주 방식이 정말로 정당하지 못한 것인지 따지는 것은 잠시 제쳐 두더라도,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게 '정격'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도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개념은 사실 엄밀하게 정의하기도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격성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역사적 증거들도 결코 많지 않아서 그것으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얻기에는 너무나도 불충분하고, 그나마 전해지고 있는 문헌이나 그 밖의 여러 증거들도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연주자의 직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옛 청중은 현대인과 다를 수 밖에 없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에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연주한다 해서 그 의미가 오늘날의 청중에게 똑같이 전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런 이유로 정격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거나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허상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격 연주'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독선적이고 교조주의적인 뉘앙스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꼈고 이에 반발했다. 물론 고음악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시간에 흐름에 따라 음악학자들과 고음악 연주자들은 차츰 '정격 연주'라는 용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옛 음악을 연주한다고 하여 모두 정격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옛 음악 연주를 가리켜 무조건적으로 '정격 연주'라 하는 것은 사실 정확한 설명도 되지 못 한다는 점이다. 1970년대 연주에 대하여 그렇게 말한다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의 고음악 연주에 대해서는 '정격 연주'라는 용어가 항상 적절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요즘에는 가장 비타협적이고 순수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고음악 연주자들도 정격성 그 자체에 집착하지는 않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정격성을 복원하고 '재구성'하는 것보다는 우리 시대의 철학을 반영하여 '재창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제는 한국에서도 고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런 생각이 조금씩 퍼지고 있어서 '정격 연주'라는 낡은 용어보다는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정격 연주'라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하다. 그러나 10년 전쯤에 비하면 사정이 훨씬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사람들이 '정격 연주'라는 말을 피해 새롭게 쓰고 있다는 표현이 왜 하필이면 '원전 연주', '원전 음악', '원전 악기'와 같은 용어란 말인가? 이는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이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 표현들도 역시 적절하지 못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국내에서 열렸던 일련의 국제 바흐 페스티벌의 총 책임자였던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강해근 교수도 역시 비슷한 생각을 주장하고 있다. 강 교수는 '원전'이라는 말이 아마도 '원전판(Urtext edition)' 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을 거라면서 '원전 연주'라는 말에 직접적으로 대응되는 외국어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강 교수가 제안한 용어는 '당대 연주'였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 용어도 곧잘 쓰이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월간 객석>에서 '정격 연주'라는 낡은 용어를 몰아낸 건 전적으로 강 교수 덕택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말을 배척하고 새로운 용어를 쓰기 위해서는 좀 더 설득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원전 연주'라는 말은 왜 부적절한가? 내가 보기에 진짜 문제는, 사실 이 말이 '정격 연주'라는 용어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도 역시 '오리지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 이외의 것은 왜곡된 연주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격 연주'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뉘앙스나 '원전 연주'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나 사실은 그게 그거인 셈이다. 원전이라고? 대체 무엇이 원전이고 무엇이 오리지널이란 말인가? 많은 옛 악기 연주자들은 사실 오리지널 악기보다는 그것을 복제한 악기를 연주한다. 따라서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는 엄밀히 말하면 원전 악기인 것도 아니다. 대개의 경우엔 그저 '카피'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원전 연주'니 '원전 악기'니 하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고 있다. 외국에서 꽤 한참 전부터 '정격 연주'라는 말 대신에 자주 쓰는 표현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 또는 좀 더 간단히 줄여서 HIP
역사주의 연주 또는 역사에 바탕을 둔 연주(historical performance)
시대 연주(period performance)
 
마찬가지로 악기를 가리킬 때에도 다음 중 하나를 골라서 쓸 수 있을 것이다.
 
시대 악기(period instruments)
역사적 악기(historical instruments)
옛 악기 또는 고악기(early instruments)
 
이 용어들은 모두 고음악 연주의 핵심이 바로 '역사'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중에서 '시대 연주' 또는 '시대 악기'라는 말은 내가 즐겨 쓰고 있는 표현인데, 연극에서도 배우들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옷을 입고 나와서 그 시대의 도구들을 쓰는 등, 그 시대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는 경우에 '시대극'이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예술 작품을 '시대물'이라고 일컫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시대 연주'라는 용어는 역사주의 연주를 가리키는 또 다른 말로서 아주 적확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때때로 '시대'라는 말 대신에 '당대'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라는 말은 문제의 중심에 있는 '바로 그 시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를 의미할 때도 있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소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당대 연주'보다는 '시대 연주'라는 말이 좀 더 나은 것 같아 보인다.
 
한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연주' 또는 '역사주의 연주'라는 용어는 보다 포괄적인 용어로서 절충주의 연주처럼 반드시 시대 악기를 쓰지 않는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용어도 '시대 연주'라는 표현과 함께 즐겨 쓰고 있다. 아울러 '정격연주'나 '원전연주'라는 말보다는 '역사주의 연주' 또는 '시대 연주'라는 표현이 더 널리 쓰이기를 희망한다.
   

-尙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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