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날의 미켈란젤리, 피아니스트로 ... (1939~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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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아돌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제3회 브루셀 콩쿠르는 개최될 수 없었다. 그러나 중립국이였던 스위스에서는 새로운 국제 콩쿠르가 창설되었다. 이 대회에 참석한 미켈란젤리는 7번째 연주자로 예정되어있었고, 1939년 6월 8일 미켈란젤리는 이 대회에서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였다. 여왕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 일까? 심사의원중 한명이였던 알프레드 코프토가 외쳤다. "새로운 리스트가 탄생하였다" 이 간결하고 영광스러운 카피와 함께 미켈란젤리는 콩쿠르의 우승자가 되었다.


코르토는 미켈란젤리에게 그의 사진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사인하였다. "아루투르 베데티 미켈란젤리 당신에게 나의 경의를 표합니다." 이렇게 전설은 시작되었다. 신문들은 앞다투어 열광적인 평가를 내놓았고, 곳곳에서 연주회 요청이 빗발쳤다. 이태리의 메이저 음반사에서는 그에게 레코딩을 제의하였다. 코르토의 논평은 이런한 열광을 가능케 하였고, 평론가들 역시 미켈란젤리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곧 유럽전체가 세계 2차대전의 포연 속으로 휩싸여들었고 이탈리아도 피할 수 없었다. 벨기에 왕족이였던 이탈리아의 여왕이 미켈란젤리를 병역의무를 전쟁으로부터 면제시켜주기위하여 중재에 나섰지만, 미켈란젤리는 그 민감한 시기에도 조국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미켈란젤리는 조국을 위하여 군에 지원하였다. 그가 전쟁중에 지원한 병과는 놀랍게도 공군조종사였다. 전쟁중 독일군에게 사로잡혀 포로생활까지 하였지만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였고 뒤에는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활동까지 뛰어들었다. 매우 까다롭고 완벽하게 알려진 미켈란젤리였지만 그도 평범한 사람처럼 조국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2차세계대전중의 미켈란젤리의 경력은 다른 예술가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경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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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음악팬들은 이탈리아의 '제 2의 리스트'를 곧바로 기억해냈다. 1946년 전후 최초로 베를린에서 열린 콘서트, 1948년에 열린 미국에서의 콘서트 그리고 아시아 투어를 통해서 미켈란젤리는 흔들림없는 그의 위치를 구축하였다. 1949년 그는 쇼팽 서거 100주년을 맞아 열린 폴란드의 쇼팽 축제에서 '공식 피아니스트'의 역할을 하였다. 여러 면에서 그의 연주는 전후 찾아온 새로운 '현대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청중들에게 내면의 비경을 열어 보이는 '선지자'로서의 연주가상은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었다. 과장된 루바토나 악보를 깡그리 무시하는 주관적 해석도 더 이상 인정받지 못했다. 특정한 기교를 발달시켜 전반적인 테크닉의 불균형을 덮어버리는 것도 더 이상 불가능했다. 새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또렷하고 정갈한 터치, 정확한기교, 악보의 객관적 전달이었다. "내게 갈채가 보내지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갈채는 베토벤이나 쇼팽, 드뷔시에게 보내져야 한다" 고 말하곤 했던 미켈란젤리는 이런 전후세대의 요구를 앞장서 선도해갔다.


그가 자기 직업을 대하는 태도는 열정이라기보다 일종의 의무감에 가까웠다. 그는 매일 열 시간씩 연습을 빼놓지 않았다. 병약한 체질이었던지라 오랜 연습이 근육통과 관절의 통증을 동반했지만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그의 콘서트는 종교적 체험에 가까웠다. 무대뒤에서 빠져나오듯 걸어나와 소리도 내지 않고 피아노 앞에 섰다. 인사는 절제되어 엄숙하기까지 했다. 청중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절제된 동작으로 먹이를 낚아채는 맹수처럼 건반을 잡아챘다. 피아니시모에서는 핀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잦은 이주 속에서도 알프스의 산들이 보이는 곳에만 거처를 정했으며, 연주여행 때문에 며칠 동안 눈쌓인 산을 보지 못하면 불안해하였다던 미켈란젤리. 그의 연주 또한 눈쌓인 산을 닮았다. 또렷하고 정갈한 터치, 차가움이 느껴질 정도의 정밀한 기교, 오케스트라를 맞먹는 포르티시모까지 포용하는 웅장한 스케일이 그의 연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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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리는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종종 피아노 연주는 고된 노동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피아노 연주가 팔과 어깨에 많은 통증과 무리를 유발하고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일종의 육체적 노동이였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리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악기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하루에 10시간 가량의 연습을 게을리 한적이 없었다. 그는 작품에 임할 때 우선 기교적으로 완벽해질 때까지 연습하고 난 후에야 비로서 작품의 해석에 골몰하였다. 그는 마지막 리허설이 있기 2일전부터는 연습을 중단하였다. 그것은 기계적인 연습에 의해서 베인 습관이 몸과 마음에 스며든체 무대에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미켈란젤리의 극도로 세심한 터치는 피아노 색채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 나갔고 몇몇 선각자적인 피아니스트들(리히터, 굴드등...)과 함께 미켈란젤리는 피아노 연주의 기교적, 음향적 한계를 향해 끓임없이 나아갔다. 그것은 정밀함, 우아함 그리고 힘을 겸비한 실현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노 예술가의 정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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