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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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럭비공같이 튀는 삶에 대하여.......

그는 과연 일상생활에서 그냥 살고 있는 천재였엇는가 아니면 음악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자신만의 장벽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는가...?


그것은 보는 사람들에따라 다르게 보이겠지만 아마도 모두가 공감하는 것은
그는 음악에 한하여는 장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삶을 말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말하는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그가 연주하는 것에 있다. 그가 연주하는 음 하나하나가 바로 그가 말하려는 것이다.


 그의 튀었던 경력.......


피아니스트이면서도, 오르가니스트였고,항공기 파일럿에다가 카레이서였다.
그의 경력에서는 밀레 밀리아라는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한 경력도 있다고 한다. 스키의 명수였으며 의사이기도 하였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그는 의술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한때는 알프스의 산사나이들을 모아서 합창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가 공연 연주가들에게 불리는 말은 '일급 요주의 인물' 이라는 것이었다. 공연 직전이나
 레코딩 중간에 취소시켜 버린 일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연 취소 이유는 여러가지 이다. 건강상의 문제이서부터 악기문제, 조율문제, 홀의 음향문제, 그리고 청중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다.

연주회 당일에는 하루종일 극장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소리를 점검 하였으며, 음이 완전히 조울되었다고 느껴지기 전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베를린 연주회에서는 이 기다림을 두 시간 동안이나 끈 적도 있었다. 그나마도 연주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다행인 것이었다. 파리에서는 손이 시렵다고 연주를 거부했고, 브레겐츠에서는 청중이 세 번이나 기침을 했다는 이유로 앙코르를 거부했다. 취리히에서는 에어콘이 켜져있다는 이유로 연주를 거부했다.

이로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지만 그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위하여 연주를 하지 않는다. 오직 나와 작곡가를 위해서 할 뿐이다. 그 자리에 청중이 있건 없건 상관 없다."

교육도 제멋대로 였다. 어떤 날은 블과 10 분, 어떤 날은 4 시간을 끌기도 했다. 엄청난 고액의 수업료를 요구하기도 하였고 마음에 들면,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나 가난한 사람들은 몇 년을 무료로 가르치기도 하였다.


미켈란젤리가 갇는 위험의 이유에 대하여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성격을 거론한다.
즉 , 미켈란젤리는 오늘날에는 거의 드문 이상주의자이며 완벽주의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거나 자기 뜻이 아닌 ;불순물' 이 섞인다면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타협하려면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음악은 그만큼 엄격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음악에 대한 지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는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하였다.
줄리니 마저도 미켈란젤리를 마리아 칼라스와 함꼐 예술과 삶 사이에 장벽이 있었던 두 사람의 예술라고 꼽은 바 있다. 그는 대두분 검은 옷을 입고 다녔다. 그 검은 옷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과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연주할 때 외에는 대중에게 나서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랬기에 그의 삶은 매일이 가려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매력은 자꾸만 커져갔다.


그에대한 음악에 대한 평은 '피아노를 들고 다닌 피아니스트' 라는 것이엇다.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연주는 용납하지 못하였따. 그래서 그런 것일까...? 환갑이 넘은 뒤인 80년대부터는 아예 자기 자기 마음에 맞는 음색의 피아노를 지참하고 연주여행을 다녔다.

20세기의 명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그는 명성에 비하면 남긴 음반의 수는 적은 편이다. 음반계에서는 연주뿐만 아니라 녹음에도 까다로왔던 미켈란젤리 특유의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미켈란젤리의 연주는 '맑은 물의 흐름처럼 투명하고 막힘이 없다.'는 평을 얻는다. 음 하나하나를 높치지 않는 정확하고 가벼운 터치, 피아니시모부터 포르티시모까지의 음색 표현하는데 있어서 감정의 과잉이 없는 절제, 그러면서도 규격화 되지 않고 작곡가가 의도하였던 선율의아름다움을 충분히 노래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투명한 음색만큼이나 미켈란젤리의 음악활동도 지극히 절제되엇다.


미켈란젤리는 명성을 얻은 음악가들이 흔히 1 년에 100 회 이상의 연주회를 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연주회 횟수를 1년에 40 회로 제한했다. 그의 음악의 생명력은 이런 절제에서 나오는 감정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약간은 뜬 구름같은 이상적인 사고를 하는연주 그리고 눅눅한 고뇌보다는 맑은 연주를 추구하는 것이 그의 음악 철학의 기조를 이루고 있어서인지 깊은 격정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역시 아쉬운 점으로 남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3편으로 겨우 나눠서 이 졸타를 읽어 주신분들에게 권하는 음반입니다.....


 포니트 세트라 :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1 2 집.......

 도이치 그라모폰 : 쇼팽 리사이틀 앨범 , 드뷔시의 프렐류드 1 2 집
       
                   드뷔시 영상 1 2 집 과 어린이의 차지

 피아노 라이브러리  : 젊은 미켈란젤의 연주를 녹음하였던 것입니다. (이 앨범은 20 세기 초반에 연주하였던 그의 연주색을 감상 할 수 있는 기회와 그가 바로크 음악에서부터 기조하였다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이 앨범에는 바로크를 주로 하고 낭만파 곡이 소수 잇는 음반입니다. )


참 자료를 읽다보니 미켈란젤리가 연주한 스카를라티 음반도 있더군요...

그리고 음반시장에서 둘러본 바로는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연주한 미켈란젤리도 있구요.
참 지난번에 들어보니 도이치에서 황제 음반도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개인적으로는 미켈란젤리를 지성적인 미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면 완전히 뒤로 넘긴 앞머리에다가 콧수염 그리고 날카로운 눈에다가 단정한 머리 까지 아주 냉정하고 지적인 신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이를 먹으니 아주 히스테리컬한 할아버지도 변하는군요......--


여담이었습니다. 그러면 전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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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단디24]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3
올린이 : fredsak (오종철  )    97/08/31 11:02    읽음 :  22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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