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 1 ”

요즈음 미켈란젤리에 대하여 자료를 약간 찾아 보았습니다. 통신을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얻었는데 인터넷도 들어 가 볼 생각입니다. 이 글은 제가 지금가지 써 왔던 미켈란젤리에 대한 글과 다른 분들의 글을 참고하였습니다.

미켈란젤리의 생애를 쓰면 이러하다. 아루트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는 1920 년 이탈리아의 브레시아 근교의 오르치누오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이면서 피아노 음악가면서 작곡가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켈란젤리는 3 세 때 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금후에는 오르간을 배우게 되었다. 6살 때에 첫 연주회를 가지게 되엇고 10 세 때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원에 입학해 주세페 안포시에게 배웠고, 13 살 때인 1933 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시절, 어린 미켈란젤리는 학교의 발표회에 나간 적이 있었다.

무대에 들어선 그는 한참 동안 의자에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떠 버렸는데...... 선생은 아마도 무대가 무서워서 그러려니 생각하셔 다시 그를 내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아이는 다시 돌아와 버렸다. 마침내 청중이 의하해하며 조용해지자 아이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서 체르니의 연습곡을 연
주하였다.

그 다음날 밀라노의 신문에서는 이 연주를 가지고서 '경탄 그 자체' 라고 하였다. 그러나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느닷없이 의학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잠시 약학과 척주의학을 배웠다. 또한 집을 나와서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가 왜 이런 엉뚱한 짓을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여기에 대하여는 중론이 있는데 전자는 아버지가 의사가 되라고 하는데에 강한 반항 심리의 발로라고 하였고 후자는 그의
기괴성과 천재성이의 증거라고 하였다.

어째튼 그는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였다. 1939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당당 1위를 차지하였고 이때부터 세상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 연주를 들은 알프레드 코르토는 그를 두고 '새로운 리스트의 탄생' 이라고 하였다.
콩쿠르 경력을 가진 그는 볼로냐의 마르티니 음악원에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2년째 될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나치를 증오한 그는 본연히 공군에 자원해 전투기를 물고 다녔다. 1944년, 독일군의 대포에 격추당한 그는 사로잡혀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그러나 8개월만에 그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지하에 숨어서 반파시스트 운동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1946년 돌연 영국 공연을 하였고, 이 공연은 대성공을 이루었다. 미켈란젤리의 본격적인 연주생활은 이때부터라고 한다. 그는 뛰어난 기교와 투명한 음색을 과시하면서 단숨에 정상급 피아니스트로 각광받게 되었다.
1948년에는 미국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나빠지기 시작하엿고 그는 결국 1952년 부터 연주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그는 프란체스코회 소속 수도원에서 1년을 보냈고, 다시 약학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미켈란젤리가 또 기벽을 부리리나 하였다.

1959년, 약 9년에 걸친 공백을 딛고 재기한 미켈란젤리는 정력적으로 연주여행을 다녔다. 볼차노, 아래조, 시에나 ,루카노 등지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으며, 1964년에는 처음으로 러시아 투어를 가졌다. 그리고 이 해에 브레치아 국제 피아노 페스티벌을 열어 1969년 까지 음악 감독직을 맡았다. 1971년엔 레코딩도 재개하였다. 이 당시 녹음한 음반이 드뷔시의 'IMAGE 1&2' 와 '어린이
차지' 였다.

1973년에는 피랜체 근교에서 서머 스쿨도 개최하였다. 그러나 1968년 그와 계약한 볼로냐의 ,BDM 음반사가 파산하게 되자 법관들은 미켈란젤리에게 9억 리라를 변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그는 연주로 받은 개런티는 물론, 집가지 빼앗기는 신세가 되엇다. 그는 두 번 다시 이탈리아에서 연주를 하지 않겠다고 공표, 1970년에는 스위스로 이주하였다. 미켈란젤리의 분노는 대단하였다. 그는 이후의 모든 연주회에서 이탈리아 청중을 거부하였
다.

1975년 바티칸에서 벌어진 그의 연주회에서는 약 8 천 명의 청중이 몰려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리의 화는 식지 않았다. 1993년에는 런던에서 있을 예정이었던 4차례의 연주회를 취소한 적이 있다. 주최즉이 애초의 약속을 어기고 80여장의 표를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팔았다는 이유 때문이
었다.

1972년 인구 1천명 남짓한 스위스의 마을 푸라에서 조용히 살다가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암을 앓아 왔지만 정작 그의 병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 내 죽음에 대하여 제발 떠들지 말라. 묘비는 필요 없다.

 이곳 푸라의 맨 땅에 묻어 주고 십자가 하나만 세워달라."

그러나 그의 장례식에는 폴리니와 아르헤리치, 조율사와 스타인웨이 경영진들, 바이올리니스트인 동생과 전 부인, 그리고 그의 비서이자 삶의 동반자였던 안느 마리 그로스 뒤부아 등 150 명이 물려 들었다. 또한 그가 죽은 지 1 년 쯤 지나자, 고향인 브레시아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국제 피아노 페스티벌을 열었다.

여기에는 스티니 슬라브 부닌, 르네 뒤샤블, 에브게니 키신, 마우리치오 폴리니 등이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다.


미켈란젤리의 음악 세계와 음반경력.......

그의 음악은 나쁘게 말을 하면 결벽증 환자였고 음악의 완성도에서 말하면 완벽주의였다. 그렇지만 난 미켈란젤리에 대한 음악의 관점에서 말을 하고 싶기 때문에 완벽주의라고 표현하겠다.

미켈란젤리의 위험성은 음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협연한 지휘자와 의견이 맞지 않아, 도중 하차한다든가, 레코딩이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승낙을 하지 않는다는가 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음에대하여는 신경질적인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기존의 레코드 음질을 신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명성에 비하여 음반수는 많지 않다. 그런 수많은 위험속에서도 미켈란젤리의
음반의 인기는 대단하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음반의 대부분은 도이치 그라모폰과  EMI  것이다. 마이너 레이블
에서는 한 두 종이 있다.

내가 종래 생각하던 그의 음악 세계는 감상주의에 젖어 있는 낭만주의의 연주에 가까운 음악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는데 그의 음악 세계는 의외로 바로크 음악에도 넓게 퍼져있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의 음악의 바흐와 스카를라티까지도 넓혀져 있다고 한다. 바흐 - 부조니 편곡 ' 샤콘느' (EMI)  에서 나오는 날카로움과 여백의 조화와 바흐- 이탈리아 협주곡 (텔텍) 에서 나오는 안단테의 아름다움은 그의 바흐 음악에 대한
지평을 넓혀 준다고 한다.

EMI 의 테스터먼트 음반에 수록된 스카를라티연주는 음악 연주사의 위대한 해석중 하나라고 한다. 클라브생의 전통을 살리는 분산화음과 색채, 로코코 장식음의 완벽한 소화, 정밀한 반음계 제어,
맑고 따스하게 흘러가는 건반의 흐음이 여기에 있다.

이 스카를라티 연주에 대해 '하이파이 뉴스' 지의 브로닉은 "넥타를 모으면서 날아 다니는 휘파람새 같은 신비함" 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르 몽드 라 뮈지크 상 , 디아파종 상, 클래식 CD 상, 등을 수상한 명연으로,
젊은 미켈란젤리의 순수하고도 깊은 탐구를 짚어보게 만든다.

'포니트 체트라' 에 실린 모차르트 협주곡  녹음들에서는 미켈란젤리의 양식사적 접근을 살필 수 있다. 음의 색채에서 빠져나와 모노톤의 건조한 해석을 보여준다. 순수한 디름과 순수한 형식, 그리고 순수한 기교를 보여준다고 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음반의 음질은 살아 있는 미켈란젤리가 들으면 당장에 절판될 수
준이다. (라이브를 녹음한 것이다.)

베토벤에서 보여주는 미켈란젤리는 약간은 제한된다고 한다. 황제 협주곡을 가지고 말을 하자면 투명한 기교와 완벽한 터치는 변함이 없지만, 화음변화의 지나친 단절과 다이내미즘의 절제가 낭만주의적 정서를 위축시키고 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그에게 있어서 다른 베토벤 이후의 음반에서는 다이내미즘이 살아나고
있다.....)



출처 :
http://cafe.naver.com/gosnc/1577
『슈만과 클라라 (클래식)-음악가 사전 (go SNC)』 493번
제  목:[단디24] 미켈란젤리 - 1                                    
올린이:fredsak (오종철  )    97/12/13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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