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만 그리고 플레트네프 ”
'건반위의 짜르'라는 멋진 별명도 갖고 있는 미하일 플레트네프. 사진에서 보이는 것 처럼 범상치 않은 외모와 카리스마의 소유자이다. 지난 내한공연에서 보여준 말 한마디 없는 차가운 무표정과 경지에 다다른 기교와 연주는 듣는 이를 경악으로 몰아넣었다. 일체의 허식과 잡념없는 순음악적 감동이라고 할까. 무대로 걸아나와 앉자마자 연주에 몰입하고 끝나고 나서는 다시 걸어나가고 앙콜연주가 끝나자 역시 말없이 손으로 엑스자를 그으며 더이상의 앙콜은 없다고 무대를 떠나는 말없는 짜르.
플레트네프는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고 78년 차이코프스키 콩쿨 우승자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신동 소리를 듣는 다른여타 음악가들과 별 반 차이가 없지만 그 후 활동을 보면 사정이 다르다.
러시아 연방이 붕괴되고 난 후 직접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였고, 지휘자 활동을 겸하게 된다. 이때부터 피아니스트로서의 역할보다는 지휘자의 역할에 더 중점을 두고 활동하여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이 약간은 위축되게 된다. 하지만 지휘자로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었는데 그 대표적인 음반이 얼음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이라는 화려한 찬사를 들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음반이다. 버진에서 발매된 이 음반은 대단한 찬사와 함께 플레트네프가 DG에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게 된 계기가 된다.
이후 더 나이 늙기 전에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싶다는 플레트네프의 바람과 함께 러시아 내셔럴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에서 객원 지휘자로 물러난다. 피아니스트로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하면서 절정에 다다른 음악가의 역작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물론 그 사이에 DG에서 발매된 음반들 또한 높은 음악적 완성도를 자랑했지만, 피아니스트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카네기홀 실황음반을 시작으로 초창기의 강인하고 직선적인 음악 어법에서 벗어나 유유하면서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한다.
DG에서 발매된 쇼팽,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음반에서 이미 그의 음악적 방향이 예고 되었지만, 본격적인 귀환을 알린 이후 쏟아진 신보에서는 보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그의 음악적 방향이 모색되었다.
곡을 해체해서 재조합하는 듯한 그의 과감한 음악적 실험이 많은 평론가들의 논란을 불러일으켰음은 물론이지만, 그를 추종하는 많은 매니아 또한 동시에 양산하였다. 적극적으로 전면에 나서서 정공법으로 음악을 해석하던 멜로디아나 버진 시기와는 달리 DG 시기에는 과도기적 과정을 거쳐서 C.P.E BACH나 슈만 음반들을 통해 파격이라 불리는 음악적 해석을 보여주게 된다.
플레트네프가 음악의 절대적 정신이라고 표현하며 존경한 미켈란젤리나 호로비츠처럼 그도 그만의 철옹성과 같은 음악세계를 완성해가는 중이다. 성장하는 어린 아이와 같이 그의 음악 세계는 꾸준히 성장하여 왔다. 데뷔 무렵부터 이미 정상급의 연주자였지만 그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그의 음악 세계는 플레트네프라는 이 이름에 무한한 신뢰감을 안겨주었다.
이 시기의 플레트네프 음악은 강공법을 선택, 음악에 대한 직선적인 해석과 강인한 기교 빈틈없는 음악을 보여주었다. 촘촘히 짜여진 옷감처럼 단단하면서도 애매모호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피아노 터치와, 러시아 정통 피아니스트를 계보를 잇는 피아니스트 답게 경지에 다다른 피아노 기교를 보여준다.
지휘자로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발매된 음반들. 이 시기의 음악은 지금 생각하면 과도적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부드러워지면서도 완숙해진 음악적 해석으로 이미 최정상급의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되었던 음반들이다.
아르헤리치와 타계한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한 음반. 아르헤리치와 함께한 프로코피에프 음반은 레파토리의 희귀함은 물론이지만 최정상급 연주자의 만남이라는 의미외에도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아우라는 풍기는 음반이다. 이 음반에서 플레트네프는 아르헤리치에게 적극 호응하면서도 뒷받침 하는 연주를 한다.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연주자의 만남이지만 결과는 듣는 이로 하여금 최고의 만족감을 가져다 준다.
지금은 타계한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한 라흐마니노프와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3번. 말이 필요 없는 클래식의 대표적인 곡들이지만 이 날 로스트로포비치와 플레트네프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와 프로코피에프는 기존의 명반들과는 전혀 괘가 다른 아주 독창적이며 파격적인 실험을 겸하고 있다. 호불호가 갈리는 음반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 음반을 대단히 좋아한다.
마지막으로 창조와 파괴라는 이름에 걸맞는 슈만의 음반. 곡을 해체하는 것 같지만 어느새 재조합해 새로운 슈만상을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음반이다. 플레트네프의 새로운 음악세계 정점을 알리는 음반이라 생각한다.
이 외에도 멜로디아 시절 녹음한 차이코푸스키의 피아노 소품집도 유명하다. 멜랑콜링에만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과 과장된 템포 조절없이 정석적인 해석만으로 차이코푸스키의 우울과 아름다움을 표현해 낸 음반이다. 이런 절묘한 균형감각은 이후 플레트네프가 발표한 모든 음반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기이도 하다.
Trackback :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