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승림의무대X파일 -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 ”
피아노는 커다란 덩치에 비해 워낙 섬세한 악기인지라 진동이며 기온 변화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것 이상으로 손상되기 쉽다. 따라서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피아니스트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20세기에는 피아노를 직접 공수해가지고 다닌 거장들도 간혹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있다면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고유한 음색으로도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다. 하지만 그 음색이란 것이 아무 피아노에서나 살아날 수는 없었다. 음량을 인위적으로 다듬고 조율한 그들만의 피아노와 또 그를 따라다닌 전속 조율사의 덕이 크다.
워낙 까다로운 결벽주의자로 유명한 미켈란젤리는 한 가지라도 불만족스러운 조건이 있다면 공연을 취소했다. 날씨, 음향, 그리고 자신의 건강상태가 모두 갖춰져야 무대에 들어섰으며 무엇보다 자신과 함께 여행온 피아노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했다.
한번은 일본에 공연을 갔을 때 피아노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다. 당연히 미켈란젤리는 공연을 취소했다. 유럽이었다면 미켈란젤리의 이런 튀는 행동이 결코 놀랍지 않았겠지만 일본은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미켈란젤리의 여권을 압류하고 엄청난 위약금을 부과하며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미켈란젤리는 이후 다시는 일본을 방문하지 않았다.
연주회만큼이나 그는 레코딩에서도 까다로운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의 레코딩이 숫적으로 적은 이유는 온전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에만 비로소 마이크 앞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음반 때문에 미켈란젤리는 조국 이탈리아를 등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968년 미켈란젤리의 전속 음반사였던 비디엠(BDM)사가 파산하자 이탈리아 당국은 그의 피아노 두 대를 압류했다. 조국을 위해 피아니스트라는 신분을 불사하고 총까지 들고 참전했던 그는 대단히 격노해 결국 스위스로 망명했고, 그 뒤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지 않았다. 심지어는 주최 쪽이 이탈리아인에게 티켓을 팔았다는 이유로 런던 콘서트를 취소할 만큼 그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이탈리아령이 아닌 바티칸에서는 꾸준히 콘서트를 열며 애정을 표시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23세는 미켈란젤리의 동향 친구였으며 수도원에서 함께 생활한 적이 있는 각별한 사이였다.
1960년 4월28일 저녁에도 그는 바티칸 베네딕트 홀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고 있었다. 2악장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밤하늘에 번개가 번쩍였다. 점점 잦아드는 피아노 소리 위로 그 다음에는 천둥소리가 내려앉았다. 마침 천둥이 내려친 시기는 이 마에스트로가 경쾌한 3악장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자연이 선사한 시기적절한 애들립에 잔뜩 고무된 미켈란젤리는 충만한 영감으로 이날 공연을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이 연주실황은 아무런 편집없이 있는 그대로 녹음되어 1991년 미켈란젤리의 승인 아래 히스토리컬 레코딩으로 발매되었다. 물론 그 장엄한 천둥소리도 함께.
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1041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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