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애 후반기의 삶과 유명한 그의 일화 (~ 1995) ”

미켈란젤리가 자신의 피아노를 전세계로 가지고 다닌 일화는 유명하다. 피아노는 진동이나 기온변화를 겪은 뒤 세심하게 튜닝해야 하고 메커니즘이 손상되기 쉬운데다 운송료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미친 짓'을 하는 연주가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리의 스타인웨이는 그가 가는 곳마다 트럭이나 비행기에 두꺼운 천으로 둘려싸여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또한 그의 전속 조율사를 항상 동행시켰다. 어쩌다 피아노를 가져가지 못할 경우에는 악기선택에 매우 까다운 주문을 하였다. 한번은 그가 일본에서의 예정된 첫날 공연을 취소한 적이 있었다. 그의 피아노가 일본까지의 긴 여정으로 상태가 좋지않았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일본사람은 그의 여권을 압류하고 그에게 상당한 수준의 위약금을 부과하는 등 감정적인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미켈란젤리는 그 뒤 일본에서 연주회는 물론 일본도 절대 방문하지 않았다.


그의 연주회 취소 이력은 분명 악명높았다. 100%의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가차없이 연주를 취소했다. 병약했기 때문이게도 했지만, 그는 좋은 피아노, 쾌적한 날씨, 좋은 음향이 다 갖춰져야 만족했다. 녹음에 있어서도 그랬다. 그의 화려한 연주여행에 비해 레코딩은 분명 적은 편이다. 첼리비다케처럼 레코딩에 태생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실제 이유는 그가 완전히 '세팅'에만족해야만 녹음에 응했기 때문이었다. 녹음 과정에는 꼭 필요한 실무자만 입회해야 했으며,레코드사 고위관계자까지도 녹음실 근처에 얼쩡거릴 수 없었다. 그러나 녹음 자체는 한 두 번 연주로 쉽게 끝났다. 녹음된 연주를 체크해보긴 했지만 편집과정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1968년, 미켈란젤리의 음반작업 파트너였고 그가 투자를 하기도 했던 BDM사가 파산을 맞았다. 이탈리아 당국은 그의 피아노 두 대를 압류했다. 자신의 공식적인 거주지를 조국 이탈리아에서 한번도 바꿔본적이 없었지만 격노한 미켈란젤리는 조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조국을 위하여 예술가의 지위를 버리고 목숨을 걸고 전쟁까지 참전한 미켈란젤리에게 자신의 분신인 피아노를 빼앗긴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였다. 처음에는 취리히에, 그 뒤 1970년 이후에는 역시 스위스 내인 티치노에, 1979년에는 폰테 트레사 근처의 작은 마을에 정주했다. 그의 집은 이웃과는 고립되어 있었고, 이웃과의 교류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의 삶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고독한 삶이였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의 개인적 면모는 '기인'에 가까웠다고 얘기된다. 그러나 그의 기벽스러움은 예를 들어 글렌 굴드의 그것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굴드가 피아노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일종의 '철부지 소년'의 모습으로 비쳤다면 미켈란젤리의 경우 자기와 주변에 요구하는 완벽성이 너무 지나쳐 까탈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조국을 위해 참전까지 했던 그가 이탈리아에 보인 격노는 대단했다. 그가 이탈리아로 향할 때는 단지 '이탈리아 내의 외국'인 바티칸에 가거나 다른 곳 일지라도 교황 임석하의 콘서트를 갖기 위해서였다. 이름에 '축복'(Benedict)과 '천사 미카엘'(Michelangelo)를 담고 있던 그는 60년대초 재임한 교황 요한 23세의 동향 친구이기도 했고 젊은 시절 수도원에 1년간이나 생황한 적도 있었다. 요한 23세 사후에도 그와 교황청의 긴밀한 관계는 한결같았다. 1993년에는 미켈란젤리가 런던 타임즈에 사비를 들여 그의 런던에서의 예정된 4번의 모든 연주회를 취소하는 광고를 싣었다. 주최측이 이탈리아인 80여명에게 입장권을 팔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결국 런던에서의 콘서트는 1990년에 열린 것이 마지막으로 기록되었다.


1988년 10월 17일 보르도의 대극장 무대위에서 드부시의 전주곡 2집중 Ondine을 연주하던 도중 심장발작을 일으켜 목숨을 잃을 뻔 하였다. 연주도중 조금 일어서서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더니 무대 뒤로 향해 가서는 부인의 품에서 쓰러졌고, 홀에 있던 심장 전문의들이 달려와 긴급처치를 통하여 간신히 그를 살려내었다. 그러나 그를 곧 회복되어 만년까지 왕성하게 콘서트 활동을 펼쳤다. 그의 마지막 연주회 1993년 5월 함부르크 무지크할레에서 열린 드뷔시 콘서트였다.


미켈란젤리는 95년 6월 12일 루가노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그의 유언에 따라 병명도, 사망시간도 발표되지 않았다. 인근의 작은 공원묘지에 그는 묻혔고 비문이나 비석은 없었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죽음치고는 간소하였지만, 미켈란젤리가 평생을 살아온 삶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을 검소하고 고독하게 살았던 미켈란젤리였다. 신화와 같았던 거장의 죽음을 두고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폴리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에서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나의 슬픔은 극심합니다. 그의 예술에 대한 기억은 절대적인 방법으로 예술적인 이상에 헌신한 한 인간의 전형에 대한 기억과 함께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새겨질 것입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About this entry